설교
세상에서 성도가 사는 법(13)
한번 얻은 구원은 유효한가.
벧후 2:20-22절
250525주일낮설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의 유명한 일화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고 제34대 미국 대통령으로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월터 리드(Walter Reed) 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심방을 가서 30분간 대화를 하고 돌아가려는데 붙잡았다. 천국에 갈 자신이 없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아차 싶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 굳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어 일반적인 대화만 했는데 실수했구나 싶어 얼른 복음을 전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죄 사함 받고 영생 얻는 것에 대해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죽어도 천국간다는 사실을 증거 했다.
그리고 손을 잡고 기도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의 얼굴이 밝아지며 말했다. “빌리! 고맙소, 이젠 준비됐소.” 그리고 며칠 후 그는 평안한 모습으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한다.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는 선한 일을 많이 하거나 구원의 경지에 이르는 도를 닦거나 다른 방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
행 16:31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전체를 흐르는 핵심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이 말씀은 변함이 없기에 진리라고 한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진리는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로 어느 교단이나 교파를 초월하여 다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의 교리를 말할 때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의 요소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로 세분화 되어 있다. 구원의 요소라고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정리한 구원의 순서를 말하는데 이것은 교단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다. 그리고 교단에서 추구하는 내용이 그 교단의 신학이고 성경을 해석할 때의 각기 교단의 신학이 중심이 되고 있다. 교단 신학이 중심 골조를 이루고 그 위에 성경이라는 옷을 입혀 놓는 것이다. 마치 옷을 파는 옷 가게 입구에 마네킹을 세워놓고 그 위에 자기 가게의 신상품 옷을 걸쳐 놓는데 옷은 마네킹에 따라서 달라 보인다. 네모난 마네킹이냐 세모난 마네킹이냐에 따라서 걸쳐지는 옷은 다르게 보이게 되듯이 어떤 신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말씀을 보느냐에 따라서 성경 해석의 차이가 나게 된다.
오늘 본문은 신학적인 주제 가운데 구원의 교리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교단 신학의 구원론은 9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 다른 교단이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가지 교리가 견인 교리다. 견인 교리는 구원으로 택정함을 입어 예수를 믿어 거듭난 사람은 그 구원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는 이 신학의 안경을 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기본적인 신학의 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성경이 어떤 데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고 또 어떤 데서는 저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원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우리를 혼란시키는 본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자세로 온전한 신앙생활을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1. 구원 받은 성도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가?
본문 20절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이라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했다는 것은 세상에 있다가 교회로 들어온 성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는 것은 성도가 죄를 짓게 되면 세상에서 죄를 범하던 그때보다 더 악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을 간략하게 말하면 믿지 않던 사람이 전도를 받아 교회로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시 예전의 짓던 죄를 계속해서 짓는다면 믿지 않던 그때보다 더 악해진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씀이 히브리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히6:4-6절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말씀을 들으며 지난주 설교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죄를 지어도 그 죄를 회개하면 다 용서해 주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요1서 1: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면서 자백은 단순히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곤란하게 했다.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죄를 지은 여인에게 돌로 치기 위해서 양손에 돌을 들고 온 무리들을 다 돌려보내시고 여인에게 말씀하신다.
요 8:11절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범죄 한 여인을 용서해 주시며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잘못했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말로만 하는 고백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못된 일이니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깨닫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회개다.
물론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이 괜찮거나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육신을 가지고 있는지라 연약하여 범죄 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가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고 요한 일서나 요한복음에서는 짓고 회개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어서 헷갈린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인 말씀은 믿는 성도가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연약한 육신을 입고 죄악 된 세상에 살아가면서 연약함 때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득불 죄를 짓거나 아니면 별반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지나고 보니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죄는 마치 몸의 병과 같아서 감추고 숨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 안에서 더 자라고 더 악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죄는 숨기고 아닌 것처럼 위장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며 용서받고 정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구원은 유효 한가?
본문 21절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1절 본문의 말씀은 앞의 20절 말씀과 같은 내용의 말씀이다.
의의 도를 안후에 라는 말씀과 20절의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라는 말씀이 같은 맥락의 말씀으로 쉽게 표현하면 구원받은 성도가라는 의미의 말이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사람의 행위나 노력으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믿고 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제일 먼저 하나님의 택정하심이 있고 택하신 심령을 구원으로 부르시는데 이때의 구원을 중생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구원에로의 부르심이 주어지면 자연 응할 수밖에 없다. 그때에 마음 가운데 죄를 회개하는데 그 죄는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했던 불신의 죄에서 돌이키게 되며 그 때의 회개를 회심이라고 한다. 회개하면서 자연히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들어오게 되며 그때를 거듭난 심령 그래서 중생했다고 말한다.
중생 이 바로 영적 출생을 말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 전에는 죄로 죽었던 심령이 새롭게 거듭나는 것 즉 중생하는 것이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이때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학적인 용어로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한다. 구원이라고 할 때 죄로 죽었던 심령에게 임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온전한 중생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 구원은 하나님의 택정하심 가운데 들어있지 않았는데 성도들의 전도로 인하여 교회에 와보니 교회가 좋은 곳 같고 특히 그 교회가 자기 마음에 들 수가 있다. 사람들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목사가 설교하는 것이 처음에는 잘 모르겠는데 지나면서 귀에 들어오기도 해서 교회 나오기 시작한다. 교회를 1년 정도 다니니까 세례교육 받으라고 해서 교육에도 참석하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니까 세례주고 세례 받았다고 직분도 주고 일도 맡겨 주었다. 그러다보니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지나다보니 싫증이 나고 교회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보이고 사람과의 관계도 별로고 해서 나갈 마음이 없어지고 한 두 번 안 나가다 보니 아예 나가기가 싫어졌다. 그런데 옆집 사는 사람이 절에 가지고 해서 가 보니까 역시 마음에 끌리는 것이 있어서 거기로 나간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을 볼 수 있다. 저 사람이 어느 교회에 집사 직분을 받았던 사람인데 어느 날 보니까 절에 가있다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마침내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오늘 본문이나 히 6장 말씀은 이런 경우를 말하는데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구원이 온전한 구원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에는 결코 잘못이 없다. 진정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구원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인가를 생각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정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먼저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라고 입으로 시인해야 된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순종의 삶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가 선한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자연히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행하는 삶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거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신바 되어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우리의 구원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에 감사하는 마음과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신앙생활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한번 택정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은 결코 오류가 없기에 한번 구원에 이른 사람은 결코 구원에서 이탈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드리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며 말씀대로 순종하여 선한 일들을 많이 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도는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
내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되었음을 확신하여 그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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