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쁨의 플랫폼 (9)
참된 겸손의 교과서
빌 2:5-11절
250831주일낮설교
주님의 기쁨이 당신에게 옆 사람에게 축복하기 바란다.
기독교의 경건을 생각 할 때 비움이나 없다는 의미의 한자어 무자를 머리에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적 사상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명상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명상이라는 것은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여 잡된 생각이나 불순한 것들을 비워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비우려고 한다고 해서 깨끗하게 비워지는 것이 아니다. 잠시 우리 마음에 더럽고 추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도 빈 마음이 되면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더 악한 생각이나 죄악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
눅 11:25-26절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서 죄를 떨쳐내고 악한 생각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악한 생각을 안 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생각을 안 하려고 애써도 어느새 악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기에 오히려 우리 마음을 다른 것으로 가득 채우면 우리 마음은 죄악에서 떠나고 악한 생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가정의 식탁에 찌개 국물이나 김치 국물이 흘러서 지저분해지면 행주를 사용해서 깨끗하게 닦는다. 이때 행주를 깨끗하게 헹구어서 물기를 짜내고 식탁을 닦으면 온갖 더러운 국물들을 흡수하면서 깨끗하게 닦인다. 그러나 이미 행주에 다른 지저분한 것들을 닦아서 물이 흥건해 있는 것으로 아무리 식탁을 닦아도 식탁은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지저분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빈 마음이 되면 온갖 잡동사니들로 우리 빈 마음에 채워지게 된다. 그러면 어느 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은 죄악으로 가득하게 되어 악한 것들만 생각하고 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상을 통하여 내 마음의 더러운 것들을 떨쳐내어 정화하려고 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말씀으로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말씀이 내 심령을 가득 채우면 다른 것들이 틈타거나 내 마음을 노략질 할 수 없게 된다.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한다. 말씀 묵상하여 말씀으로 우리 심령을 채우는 것과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같은 의미의 말이다.
요 5: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느닷없이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귀한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협력하는 아름다운 교회였다. 그러나 그 교회에도 연약한 교인들이 모여 있었기에 자연히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했다. 다툼과 허영심으로 인하여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나누어지는 위기를 만났다.
그래서 다툼이나 허영심을 버리고 겸손함으로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자세를 견지하여 하나가 되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러면서 겸손의 모범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겸손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시켜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다. 예수님은 입술로만 겸손을 말씀하지 않으셨고 실제 겸손을 어떻게 하는지를 친히 몸소 보여 주셨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된 겸손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아 각자의 삶에서 온전히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본문6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다. 장로교회의 교리의 근본이 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이 삼위일체에 관하여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삼위로 하나이시며 본질이 하나이시며 능력과 영원함에서 하나이신데 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그 무엇으로 구성된 분이 아니며 나지도 않으셨고 어디서 발출하지도 않으시며 성자는 영원히 성부로부터 나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최고의 근원자로부터 비롯되다.)하신다.”
이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가장 고귀하고 심오한 진리다. 이는 억지로 해석하거나 사람의 이해를 통해서 인식하려고 해서도 안 되고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고백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이므로 신의 속성을 유한한 인간의 지혜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큰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단들이 바로 이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만큼 인간의 지식이나 이해 그리고 경험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진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만 그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시는데 바로 성부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 삼위 하나님은 나누어지지 않으시지만 분명하게 구별되시며 삼위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은 동일하시다. 따라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삼위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그분께만 충성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가야 할 줄로 믿기 바란다.
그래서 본문 6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시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한 미래까지도 항상 하나님의 본질이시며 하나님 자신인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1장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요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면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인 로고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처음부터 함께 계셨다. 처음부터라고 했을 때 시작을 말하고 있지만 성 삼위하나님은 이 우주의 시작이 있기 전에 존재해 있었다. 창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1: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창세기의 태초는 이 우주의 시작을 말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우주를 만드시기 이전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인간이 쓸 수 있는 표현으로는 표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태초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우리의 신적 대상인 것을 말씀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하나의 본체이셨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되셨나?
2. 신이신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본문 7-8절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성부 하나님과 영광의 본체이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시며 하나님으로서 누리실 모든 영광을 충분히 누리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모든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를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우리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지만 여전히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 사시는 그 어느 한 순간도 그분의 신성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자신을 비우는 겸손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도 낮아지심이지만 그는 왕궁에서 출생하거나 돈 많은 재력가의 아들도 아니고 일반 서민의 한 사람으로 오셨다. 출생이나 성장에 있어서 특별하지 않으셨고 그의 삶 자체가 사람들에게 높임이나 영광을 받는 자리에 계시지 않으셨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겸손을 말씀하시면서 내게 와서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하신다.
마 11: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마20:28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고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부탁하셨다.
마 20:26절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하며 그 명령에 기꺼이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는다.
이렇게 주 안에서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높이신 것처럼 우리도 높여 주실 줄 믿기 바란다.
본문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 5-11절 말씀은 예수님의 비하 즉 낮아지심의 신분과 승귀 즉 높아지심의 신분을 말하고 있는데 승귀 즉 높아지심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이 부분은 넘어가고 오늘은 낮아지심의 신분만 살펴보았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의 신분은 낮아지심이었고 낮아지심의 극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이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죽을 수는 없을지언정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기 위해서 힘쓰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참나무 한 그루가 자기의 강인함을 자랑하면서 옆에 있는 갈대를 은근히 비웃었다. 갈대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고개를 숙이고는 굽실거린다는 것이었다. 참나무가 강직한 자기의 몸통을 자랑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폭한 돌개바람이 불어오자 그 바람에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뿌리까지 뽑힌 채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참나무를 보고 갈대들은 자기들이 강해서 살아남았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그때 아이들이 쓰러진 참나무 주위로 몰려와서 놀기 시작했고 재미삼아 옆에 있던 갈대들을 한 움큼씩 잡아 뜯어서 이리저리 함부로 내둘렀다. 뽑혀 버려진 갈대들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만 말라 죽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강자나 약자도 없고 오직 겸손 만이 있을 뿐이다.
신이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영광과 권세를 내려 놓으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셨다. 그 과정 속에서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겸손의 모습을 본받기를 원하시는 뜻을 헤아려 겸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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