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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받고 싶은 교회(16) 행복한 신앙생활을 이어 가는 길
2026-06-13 15:33:28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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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받고 싶은 교회(16)

행복한 신앙생활을 이어 가는 길

살전 5:19-22

프리드리히 니체는 기독교를 비판한 철학자로 그의 철학 사상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가 한 말 가운데 동의할 수 있는 표현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그들의 구세주를 믿도록 하려면 좀 더 나은 노래를 들려주어야 하리라. 구세주의 제자들은 내 눈에 보다 더 구원을 받은 것처럼 보여야 하리라.”고 했다. 이 표현은 오늘 우리들이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우리 자신을 위할 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믿지 않는 불신 영혼들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신앙생활은 구원받은 백성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평안과 행복을 상실한 채 아무 의식 없이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저 틀에 박힌 모습으로 행해서는 안 된다. 기쁨과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는데 참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관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조건들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할 때에는 불만족과 원망 불평이 떠나지 않는다.

지난주에 우리 성도들이 참된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간절한 소원을 담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세 가지 요소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의무로 여기지 말고 우리에게 참 행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을 믿기 바란다. 이러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고 포기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행복한 삶을 잠시 맛보기보다는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세 가지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말씀하시는데 어떤 것인지를 살피며 주시는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1. 성령의 불을 꺼서는 안 된다.

 

본문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성도들 속에 내주하시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공동체적 삶에 역사하시는 거룩한 영을 의미한다. 초대교회에는 성령을 불에 비유해서 이해했다.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더니

120명의 성도 들은 주님이 승천하시며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는 주의 명령에 따라서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을 떠나지 않고 기도에 힘썼다. 열흘쯤 되어서 오순절에 성령의 능력이 임했다. 그들에게 임한 성령에 대해서 불같은 성령이라고 묘사했다.

본문에서 언급하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은 성령의 불을 꺼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말이다. 성령의 불을 끈다는 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성령 자체에 어떤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제 삼위 하나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힘이나 의지로 성령 하나님을 대항하거나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성령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며 구원하기로 택한 심령에 내주하신다. 믿는 성도들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강압적으로 이끄시지 않는다. 인격적으로 우리가 자기 자아를 내려놓고 성령의 다스림을 구할 때 우리의 생각과 삶을 주장하시고 역사하신다. 이 상태를 성령 충만이라고 하며 우리는 늘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성령 충만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늘 기도하며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며 정결하게 할 때 이루어진다. 한번 성령 충만했다고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자신의 주도권을 내가 아니라 성령께 의탁해야 한다. 성령 충만과 자아 충만은 서로 반 비례 한다.

성령이 충만하면 내 자아는 약화 되어 모든 주권을 성령께 내어 맡기게 되고 자연히 내 안에 가득한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게 된다. 그러나 내 자아와 욕심이 살아 있으면 자연히 성령 하나님은 내 안에서 탄식하시며 안타까워하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온전한 삶은 내 자아 충만이 아니라 성령 충만을 구하는 신앙이 되어야 할 줄 믿기 바란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것은 영적 은사를 소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복음의 확장으로 인하여 교회가 세워지는 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에는 성령의 강한 영적 능력이 나타났다. 각종 병이 낫고 심지어는 죽은 자가 소생 되었다. 그러나 이미 여러 곳에 교회가 세워지고 난 뒤에는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성령의 영적 능력보다는 성령으로 인한 성도들의 온전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들 가운데 열매 맺는 신앙생활이 필요했다. 그래서 갈 522-23절에서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유실수에 열매가 맺히듯이 성도들의 삶에도 성령의 열매가 잘 맺혀야 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와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혀야 하며 그 열매들이 성숙되어 잘 익어가야 한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고 해서 다 사랑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유실수를 보면 거의 모든 꽃이 수정되어 조그만 열매를 맺고 있다. 사과 나무에 지금은 작은 형태의 사과가 달려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사과가 열렸다고 말을 하지만 지금 맺힌 사과는 먹을 수 있는 사과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 가을이 되면 그 사과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자라게 된다. 마찬가지로 조그만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혔다고 해서 그것이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계속 자라며 뜨거운 여름의 햇볕과 비바람을 견디며 성숙(엘리야) 되어야 비로서 인정받는 사랑의 열매가 된다. 우리의 신앙의 열매인 성령의 열매들도 이와 같다. 내게 맺히고 있는 열매들이 성숙한 상태로 잘 익고 있는가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는 안 보이고 육신의 열매만 드러나면 성령의 불을 꺼뜨리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기 충만이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자기 자신을 깨뜨려버리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2.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

 

본문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예언이라고 할 때 일어날 일에 대해서 미리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는데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미래적인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거나 자녀를 가진 부모 입장에서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에 있어서나 불안한 마음에 위로를 얻기 위해 앞일에 대해서 점치는 집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믿는 성도들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미래적인 일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허탄 한데 가서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 간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특히 우리 성도들은 주어진 성경에 근거하여 말씀 붙잡고 말씀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언을 소멸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멀리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경고나 예언의 말씀이 들어있다. 그 말씀들이 수천 년 전에 기록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고음을 울리며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지 말고 늘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란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는 것은 미래적인 내용이나 경고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기 일주일 전부터 미국은 히로시마에 비행기로 경고의 전단을 뿌렸다. 194586일 낮 12시 히로시마시에 원자탄을 투하하니 시민들은 모두 50밖으로 대피하라 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경고의 소리에 귀를 막았지만 소수의 사람은 경고를 받아들였다. 예정대로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 되었을 때에 단 3초 동안에 3천 도의 열을 동반한 폭탄의 위력 앞에 30만 시민 가운데 20만명이 즉각적인 죽음을 맞았고 10만 명의 사람들도 핵 방사능의 여파로 병을 앓았다.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가볍게 여기거나 건성으로 넘기지 말고 말씀 앞에 엎드려 순종함으로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성경은 장식품이 아닌 신앙의 핵심임을 깨달아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3. 죄악을 가볍게 여기거나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근묵자흑이라는 한자 성어의 뜻은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어진다는 말이다. 본문은 우리는 거룩한 무리가 되었으니 우리를 더럽히는 악은 어떠한 것이라도 가볍게 여기거나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는 것은 사람은 환경에 약하고 쉽게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맹모 삼천지교라는 말을 알고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묘지 근처로 이사를 했더니 아이가 날마다 곡하는 흉내를 내며 놀았다. 그래서 시장 근처로 이사를 했더니 장사하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서당 근방으로 이사를 했더니 비로소 공부하는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도 쉽게 죄악에 빠질 수밖에 없기에 악한 것들은 애초부터 차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믿음이 얼마나 되는지 죄악 된 현장에 들어가서 견디어보겠다고 생각하며 시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고 미련한 것이다. 요셉에게 유혹이 찾아왔을 때 그 자리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이기려고 발버둥 치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겠다고 하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요셉이 믿음이 약한 것이 아니라 굳센 믿음이 있었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범죄 하지 않았다.

우리 주변의 삶의 환경들은 우리가 넘어질 수밖에 없는 유혹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에게 이번 한 번만 내지는 이까짓 것쯤이야 하는 안일한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방심하다 보면 어느새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는 식으로 죄악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게 된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는 것은 악은 선보다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앵무새를 키우는데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욕을 잘했다. 주인이 그 버릇을 고치려고 이웃의 노래 잘하는 앵무새와 며칠을 같이 지내게 했다. 같이 지내는 동안 못된 버릇이 고쳐 지기를 바랐다. 며칠 뒤 앵무새가 있는 새 장으로 가보니 자기 새는 물론 노래 잘하던 앵무새까지 욕을 잘하더라는 것이다.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며 가볍게 여기거나 가까이 하지 않도록 늘 우리 심령에 말씀의 거울로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있기를 바란다.

안일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늘 깨어 경각심을 가지고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예언의 말씀을 멸시하지 않으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주시는 평안과 행복한 삶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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