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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플랫폼(19) 만족함으로의 초대
2025-12-13 09:07:20
사무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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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플랫폼(19)

만족함으로의 초대

4:10-13

251207주일낮설교

주님의 기쁨이 당신에게 서로 축복하며 인사하기 바란다.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사나이가 있었다. 한번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멀리 있는 곳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사나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짐을 짊어지고 길을 떠났다. 한참 가다 보니 이 사나이는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의 짐이 더 크고 무겁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느낀 순간 갑자기 힘이 빠지게 되어 점점 뒤처지게 되었다. 길이 멀어 중간에 하룻밤을 쉬고 가게 되었다. 이때다 싶어 모두가 다 잠든 틈을 타서 몰래 일어나 짐을 쌓아둔 곳으로 가서 일일이 하나하나 짐을 들어 보고 그중에 가장 가벼운 짐에다가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 두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누구보다 먼저 일어난 사나이는 자기가 표시해 둔 짐을 찾았다. 그런데 그 짐은 자기가 어제 하루 동안 불평하며 지고 온 짐이었다, 자신이 지고 온 짐이 가장 가벼운 짐이었음 에도 계속 불평만 하고 짐을 지고 온 것이었다.

불평은 습관이고 성격이다. 습관적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불만이고 감사하는 습관의 사람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감사한다. 인간의 탐욕은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다. 단지 그 탐욕을 채우려고 계속 갈망할 뿐이다. 그리고 채워지지 않음에 대하여 계속 불평하며 살아갈 뿐이다.

2024년 세계 행복 지수에서 143개국 가운데 우리나라는 52위에 위치해 있다. 세계에서 잘 사는 나라 속에 속해 있고 외국에서는 우리나라 문화에 관심과 열광을 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막상 우리나라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 지수는 낮은 수준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워서 자족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족이라는 말은 스스로 만족함을 말한다. 바울은 처한 환경이 풍요롭고 모든 환경에 문제가 없어서 만족한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옥에 갇혀 있는 신세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만족하다는 것이다. 본문 12절에 보면 비천한 상태나 배고프거나 배부르거나 풍부하거나 부족하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은 늘 만족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상황 속에서 만족함을 누리는 비결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도 어떻게 하면 만족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가를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며 주시는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1.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

 

본문 10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기쁨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고 있다. 특히 오늘 10절에서는 크게 기뻐하고 있는데 지금 바울의 상황이 기뻐할 상황이 아니고 크게 기뻐한다는 것은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석방 소식이라도 들렸으면 바울도 인간이었기에 그 마음 속에 밀려오는 벅찬 기쁨이 있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내가 크게 기뻐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상황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본문에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나오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관계가 끊어져 있던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선교 사역에 관심을 갖게 되어 에바브로디도를 통하여 보내준 선물 때문에 기쁨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빌립보교회가 바울의 선교 사역에 다시 관심을 가지고 동참했다는 소식은 바울의 마음에 기쁨을 안겨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를 가지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보내준 선교헌금으로 기뻐하였다면 그 기쁨은 잠시의 기쁨이요 다음에도 잊지 않고 보내줄 것인가 아니면 이번 한 번으로 그칠 것인가 하는 염려와 걱정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기뻐하는 것이 주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에 바울을 생각하게 되었고 바울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의 싹이 다시 피어났다. 봄에 새싹이 자라듯이 다시 복음 사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에 선교에 다시 움이 돋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 선교헌금을 보내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주목한다.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맛있는 간식을 주면 자기가 좋아하는 그것에 관심이 집중되어서 그 과자봉지를 잡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어린아이는 그 간식을 준 사람이 누구인지 왜 자기에게 주었는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역시 어린아이니까 단순해서 그렇지 라며 지나칠 수 있지만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우리 장년들은 그렇지 않은가 하면 별반 차이가 없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보낸 헌금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다시 선교에 동참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다.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 속에 바울의 선교에 대한 관심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 다시 복음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복음 사역의 동역자가 되게 하신 것에 감사하며 만족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필요를 채우시되 쓸 것을 정확하게 허락하신다. 엘리야때에 하나님께서 그 땅에 가뭄이 들게 하신다. 먹을 것이 없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동쪽으로 가서 요단강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으면 까마귀를 통하여 너를 먹이리라고 말씀하신다. 왕상 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그가 시냇물을 마셨으나.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미물인 까마귀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줄 믿기 바란다.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 바울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역사하시는 줄 믿기 바란다. 우리가 의지하고 나가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 가운데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의 필요를 말하며 욕심이 아니라 필요를 따라 구하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줄 믿기 바란다. 우리는 샘물을 바라보지 말고 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만족함으로 역사하실 줄 믿는다.

 

2. 자족함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본문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 의 비결을 배웠노라.

표준 새 번역 성경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보내준 선교헌금뿐 아니라 성도들 마음 가운데 선교에 대한 싹이 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자신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자족하는 것은 당시 철학사상에서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환경을 이겨내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을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자기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만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 줄도 아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는데 실상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자로서 당대 최고의 선생이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웠고 헬라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육신 적으로도 풍족함 가운데 처했을지라도 그것이 자기의 모든 활동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주님을 만난 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하찮은 것으로 여겨 배설물처럼 버리고 주님을 따랐을 때 육신 적으로는 궁핍과 비천함에 처하게 되었지만 복음을 향한 그의 삶에 방해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낼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그의 삶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지내오는 동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지내왔고 사명 감당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인도 하심 가운데 지내올 수 있었다. 바울은 풍부와 궁핍의 상황을 지내며 육신 적인 것에 매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을 찾으며 그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바라보았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없는지를 생각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어 채움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여기에 머물고 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고 배워가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주께 나아와 주님을 닮고 배우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닮기를 배우라는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기를 포기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 만족하며 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의 눈은 우리의 삶에서 부족하고 없는 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심령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기에 힘쓰고 주님의 마음을 배워 닮아가기를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입을 열어 기도할 때마다 주시옵소서가 아니라 나의 모습이 주님과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을 용서하여 주시고 나의 이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바울은 자기의 삶에 간섭하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했다. 더 나아가 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셔서 어떠한 순간에도 자기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확신하며 풍족했을 때나 궁핍한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스스로 만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시다. 그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복된 심령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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