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기다림의 미학
요 14:1-3절
251214주일낮설교
사람은 열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새 생명을 얻고 매미는 그 여름 한 철을 지나면 알을 낳고 죽지만 새로운 생명은 7년이라는 시간을 땅속에서 애벌레로 지내다가 매미로 부화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사람들이 즐겨 먹는 꿀 한 숟가락은 꿀벌이 사천이백 번이나 꽃을 왕복하며 얻은 것이라고 한다.
명작은 기다림의 산물이다. 베토벤은 최소한 하나의 곡을 열두 번 이상 다시 썼다고 하고 하이든은 천지창조를 8백 번이나 작품을 써본 후에야 만들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의 걸작 최후의 만찬을 8년 동안 무려 2천 번이나 스케치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25년이 지난 뒤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얻었다. 모세는 무려 80년을 기다려 하나님의 위대한 도구로 40년을 쓰임 받았다. 인생이나 신앙생활은 기다림인데 우리는 너무 조급함으로 끝까지 기다리지 못해 일을 망가뜨릴 때가 많이 있다.
신앙의 기다림에는 먼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다림이 있고 또 하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기도 응답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변화되고 겸손해지며 순종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성탄절을 앞두고 곳곳에 성탄 장식이 되고 있는데 세상은 성탄 대목을 기대하겠지만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성도 들은 이미 내 안에 계시고 내 삶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그날을 기뻐하며 기대감에 가득 차 있어야 하는데 주인 되시는 주님은 온데간데없고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주어지는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과 3년 어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열두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하루가 지나면 십자가형을 받으실 것이고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실 것을 이미 아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면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염려와 걱정에 사무쳤다.
이렇게 걱정과 염려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새겨보면서 걱정과 수고로 늘 근심이 떠나지 않는 우리의 삶에 위로와 소망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역경의 언덕을 등반하는 인생.
본문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제자들은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던 예수님이 다음 날이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마음에 밀려오는 걱정과 근심에 사로 잡혀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큰 방패요 기댈 언덕이었다. 그러한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면 홀로 남은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 메시야 인 줄 알고 따랐지만 마음속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이 때가 되면 왕좌에 오를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자기가 따르던 예수님이 왕좌에 오르면 자기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자기가 바라던것이 다 수포로 돌아 간다고 생각하니까 그 마음에 허탈감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자기들과 삼년 간 동고동락하며 의지했던 예수님과 이별한다는 것이 마음에 큰 슬픔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그러나 단순한 이별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대와 꿈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허탈감에서 오는 염려라고 하면 그것은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진실 된 믿음에서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참 제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도 역시 인간적인 욕심을 내려놓고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심령 속에 주님을 의지하며 따르는 믿음의 영역이 점점 커져야 할 줄로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각하기를 삶에 특별한 문제가 없고 어느 정도 안정되어 주님의 인도하심이 함께하지 않아도 내 힘과 내 뜻대로 살 수 있으니까 나를 그냥 좀 내버려두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성도의 모습을 요구하기 보다는 특별한 어려움을 만나지 않고 더 나아가 벌을 내리시지 말고 그냥 이대로 지내게 하시면 나는 그저 주일 낮 예배 시간에만 와서 주님께 인사드리겠다는 것이다. 평상시 엿새 동안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바빠서 주님을 찾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는 내 모습을 적당히 눈 감아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주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으면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걱정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마치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건너는 가운데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그 풍랑으로 자기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무심하게 잠만 주무신다고 원망한다.
막 4:38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잔잔하게 되었지만 제자들은 도대체 이 분이 누구시길래 바람과 바다를 제어하시는가 하고 놀랐다.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우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믿지 못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보이지 않는 주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그저 설교 시간에 들은 대로 어려움을 만났을 때 주님의 이름을 불러 보지만 그 주님이 이 문제를 곧바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가지고 있지 않다.
주님과 관계없는 신앙생활 속에는 평안과 위로보다는 세상 적인 걱정 근심으로 인하여 늘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블레셋 군대 앞에 맞선 사울 군대는 주눅이 들어 숨기 바빴다. 곧바로 싸움에 들어가지 않고 서로를 향하여 정탐의 시간을 가졌다. 시간이 지체됨에 따라서 싸움이 시작되지 않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때 사울 군대는 두려움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사울은 더디 오는 사무엘을 대신하여 대신 제사를 집례했고 제사가 끝날 때 쯤 당도한 사무엘에게 책망을 들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깊은 두려움과 염려 가운데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주님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하여 걱정하며 염려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은 염려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왜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는가를 살펴보며 오늘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 우리의 삶에서 다시 한번 위로와 소망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2.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과 함께하시겠다는 위로를 주신다.
본문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본문 말씀의 의미는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고 천국에 할 일이 있어서 가는 것이다. 내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온 것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함인데 그 구원 역사를 내일 십자가에서 다 이루면 도로 천국에 가서 구원받은 너희가 있을 처소를 마련하고 너희를 데리러 와서 나와 함께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다시 올 것이기 때문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너희를 데리러 오면 반갑게 맞이하여 함께 천국에서 영원토록 지내자는 말씀이다.
▶ 다시 올 것이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 걱정을 벗어버리고 씩씩하게 살라고 해도 그들의 마음이 금방 시들해지고 조그만 일로 인하여 넘어지고 쓰러질 것을 아신 주님은 한 가지를 약속하신다.
요 14:16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면 또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신다. 보혜사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도움을 주기 위하여 누군가의 곁으로 부른 자이다. 법적인 조력자나 변호사 위로자와 같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당시의 제자들이나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셔서 옆에서 우리를 도우시며 위로하시고 모든 것들을 밝히 알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죽으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사십 일간 이 땅에 계시면서 부활을 확증하셨고 승천하시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면 너희에게 약속하신 것을 보내어 줄 것이라고 하셨다.
눅 24:49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이 약속의 성취는 승천하신 후 열흘째 되는 오순절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성도들에게 강력하게 임하였다. 성령의 임재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역사하신다.
고전 12:3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며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이미 그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줄 믿기 바란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성령이 임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이 충만하여 나의 삶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성령 충만을 구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늘 연약하여 넘어지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심령들이지만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다시 오시마 약속하신 그 약속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신앙생활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 먹기는 사흘을 넘기지 못하기에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다.
특히 신앙생활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성령 충만은 성령이 내 심령에 가득하여 내 삶을 인도하시고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내 고집이나 내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 충만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성령 충만을 구하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져 육신 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영적인 일에 관심을 두며 하나님을 깊이 알기를 원하며 찾는 심령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다시 오시마 약속하신 약속을 붙잡고 이 땅에서 생활하는 동안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위로와 소망으로 인도함을 받고 날마다의 삶 속에 평강의 복이 가득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 번호 | 제목 | 작성자 | 등록일 | 조회수 |
|---|---|---|---|---|
| 515 | 기다림의 미학 | 사무실1 | 2025-12-16 | 8 |
| 514 | 기쁨의 플랫폼(19) 만족함으로의 초대 | 사무실1 | 2025-12-13 | 22 |
| 513 | 서로 짐을 나누어 져라 | 사무실1 | 2025-12-06 | 38 |
| 512 | 기쁨의 플랫폼 (18) 하나님의 평강의 은혜 | 사무실1 | 2025-11-29 | 38 |
| 511 | 성숙한 감사의 신앙 | 사무실1 | 2025-11-22 | 38 |
| 510 | 기쁨의 플랫폼(17) 함께 서 가는 교회 | 사무실1 | 2025-11-15 | 57 |
| 509 | 행복은 바른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 사무실1 | 2025-11-08 | 57 |
| 508 | 기쁨의 플랫폼(16) 십자가의 군사인가 원수인가 | 사무실1 | 2025-11-01 | 54 |
| 507 | 기쁨의 플랫폼(15) 목표를 향한 열정적인 삶 | 사무실1 | 2025-10-25 | 58 |
| 506 | 기쁨의 플랫폼(14) 진정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 | 사무실1 | 2025-10-18 | 57 |
| 505 |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백성 | 사무실1 | 2025-10-11 | 63 |
| 504 | 기쁨의 플랫폼(13) 바른 신앙생활을 하라 십니다. | 사무실1 | 2025-10-04 | 58 |
| 503 | 기쁨의 플랫폼(12) 동역하는 아름다운 당신 | 사무실1 | 2025-09-27 | 65 |
| 502 | 기쁨의 플랫폼(11) 뒤틀어진 세대를 거슬러 빛으로 | 사무실1 | 2025-09-20 | 64 |
| 501 | 기쁨의 플랫폼(10)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 사무실1 | 2025-09-13 | 1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