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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4/28)
2019-05-04 09:43:29
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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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 (6:4-11절)




사람들에게는 다 소원이 있고 년 초가 되면 그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소원을 빌기도 한다. 이제 다음 주면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가정의 자녀 손들은 자기 부모나 조부모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달라고 선물목록을 요구하기도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있어서 바라는 소원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인줄 믿기 바란다.


하나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기를 힘쓰므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1.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본문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6절 상반 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에브라임지파는 북이스라엘의 주요 지파로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파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는 북이스라엘을 말할 때 이스라엘로 부르기도 하고 본문처럼 에브라임으로 부르기도 했다. 본 절의 에브라임과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지칭하는 말이다.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말은 수사 의문문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탄식의 깊이를 보여주는 말이다. 활동 작이고 개구진 자녀의 경우 조용하다 싶으면 한쪽에서 사고를 치고 있다. 주의를 주고 그 일을 수습하다보면 어느새 저쪽에 가서 또 다른 사고를 친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보면 엄마가 아이를 불러 세우고 하는 말이 아들아 엄마가 너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탄식한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와 같이 안타까이 탄식하시는 것은 너희 인애가 아침구름이나 이슬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애가 무엇인가? 인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세드 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언약에 근거한 신실한 사랑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구원을 받고 언약에 따라 지속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당연히 하나님과 자비와 긍휼을 필요로 하는 주변 이웃들을 향해서 지속적인 사랑을 나타내야 했다. 그러나 주변 이웃들에게는 물론이요 하나님께도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하였다.


아침 구름은 해가 뜰 무렵인 이른 아침에 마치 비가 올 듯이 하늘을 뒤덮지만 해가 뜨고 나면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져버리는 비를 포함하지 않는 구름이나 안개를 말한다.


쉬 없어지는 이슬은 밤새 내린 이슬이 풀잎에 맺혀 있다가 해가 뜨면 즉시 다 증발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사랑이 이렇게 표현된 것은 거짓되고 변덕스러우며 진실하지 못한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어느 유수한 대학의 총장은 예의 바른 신사였고,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그의 아내가 말년에 알츠하이머라는 치매를 앓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아내의 병이 깊어져갔고 몇 년 후에는 남편을 못 알아볼 지경이 되었다. 그는 간병인을 두고 정성을 다해 병든 아내를 보살폈다.


총장은 어느 날 재단 이사들에게 총장직 사임을 통보하였다. 그가 사임을 자청한 이유는 아내를 돌보는 데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이사회는 어떻게든 총장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그 때 한 이사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애쓴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모님이 총장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시는데요.” 총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50년 동안 이 여인과 평생을 함께 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아내는 저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저는 아내를 똑똑히 알아봅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환경에서든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남북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다른 우상에게 추파를 던지며 그 앞에 머리를 숙이며 경배하였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권했지만 그 소리를 귀 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변함없고 끊임없는 헤세드의 사랑을 원하신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찬양을 부르며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결단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사랑하며 교회보다는 자기 육신의 만족과 쾌락을 먼저 추구하며 그것에는 모든 관심과 열정을 나타내고 있다.


주님과 교회를 향한 십자가의 길을 걷기 보다는 육신의 만족을 위한 꽃길만을 기대하고 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에 잠시 기뻐하고 감사할 뿐 여전히 주님에 대해서는 멀찍이 따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에 계속해서 머물기를 원하시는 줄 믿고 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하나님 알기를 바라신다.




 


본문 6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사제도를 제정하시고 그것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칭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제사를 거부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신 것이 아니라 제사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잘못된 것을 말하고 있다.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없이 형식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고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밝히고 있다.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되 레위기 제사 규정에 얽매여 마지못해 송아지나 염소 등을 끌고 가서 제사를 드리거나 죄로 인한 형벌을 무마하기 위하여 제사를 드렸을 뿐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 자세가 없었다. 5:6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본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자체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보다는 제사를 형식적으로 지내는 것으로 자기들의 의무를 다했다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세상에서 자기들의 생각대로나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대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다가 주일 예배시간이 되면 타성에 젖어서 예배에 참석하며 얼마의 주일헌금을 드림으로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자족하며 돌아간다.


우리가 주일을 지켜 예배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온전히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역겨워하시며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만 쌓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드릴 때에는 영과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하며 감사로 예배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릴 때에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줄 믿는다.




 


3. 성도의 거룩함을 회복하기를 바라신다.




 


본문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가증한 일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추하고 더러운 각종 죄악들을 말한다. 음행과 우상숭배와 살인과 폭력 같은 죄악들이 당시 북 이스라엘에 가득하여 하나님께서 토해내실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유다 땅에서도 갖가지 더럽고 추한 죄악들이 행해졌고 특히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유다의 사악한 야하스나 므낫세 왕 때에는 거룩한 성전에 각종 악한 우상의 신상들을 세우고 공개적으로 우상숭배를 행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에 실로에 언약궤가 있었고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제사장 신분으로 제사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의 제물을 탈취하고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자들을 더럽히는 악행을 저질렀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과 성전 안에서만 음행과 우상숭배가 행해졌는가? 오늘날 하나님의 성전은 우리 성도들이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전인 성도들은 거룩함이 훼손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교회는 성전이라고 할 때 거룩한 전을 말하고 우리를 성도라 할 때 거룩한 무리라는 의미다.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말이 바로 거룩 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우리 성도들은 거룩해야 한다. 거룩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거룩한 신분이 되었는데 세상의 죄악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세속화 되어가기에 세상의 죄악에 물들지 말고 세상과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살아가므로 거룩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세상과 세상 속에 속한 사람들은 다 죄악으로 치우쳐 걸어가고 있을 때 왜 우리 성도는 죄악의 세파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 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추수 때에는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불에 태워진다. 이것은 의인에 대한 구원과 악인에 대한 심판이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받아 천국백성이 되었기에 지옥에 대한 심판은 제하여졌다. 그러나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행위 심판은 주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의의 상급이 주어질 것이다. 바울도 내가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요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해당된다고 한다. 주님의 분명한 심판이 있기에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이 땅을 살아갈 때에 믿는 자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께 온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예배를 소홀히 하거나 대충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는 일이 된다. 또 우리를 성도를 불러주셨으니 예배드리는 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거룩을 잃지 않고 빛을 발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잘 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시원함과 기쁨을 드리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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